테헤란 (Tehran)
해발 1200m의 고원(高原)에 위치하고 있다. 1796년 카자르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발전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는 스커드 미사일에 의해 많은 피해가 났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테헤란로의 이름은 테헤란 시에서 유래된 것으로, 1977년 6월 테헤란 시장이 내한하여 서울에 머물면서 수교의 의미로 당시 서울특별시의 한 곳의 지명과 테헤란시의 한 곳의 지명을 하나씩 바꿔 명칭하기로 하여 삼릉로를 테헤란로로 바꾸게 되었다. 테헤란시에도 서울로(Seoul Street)가 있다.
도시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발굴 조사에서는 기원전 6000년 전의 주거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9세기에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는 레이(Rey)가 가장 번성한 도시였으며, 테헤란은 주목받는 지역은 아니었다. 13세기, 레이가 몽골에 공격을 당하면서 테헤란에 피난하여 "레이 사람들의 테헤란" 등이라고 불렸다. 14세기, 테헤란은 이름이 알려진 도시였으며, 1404년, 카스티야 왕국의 대사가 사마르칸트로 향하는 도중에 마을에 들렀는데, 이것이 서양인이 마을에 발을 디딘 최초이다. 이 시대의 마을에는 성벽이 없었다. 17세기에는 사파비 왕조의 지배자들의 주거가 만들어졌다. 타후마스부 1세는 시장과 성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압바스 1세가 우즈벡과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테헤란을 경유하게 되었을 때, 왕이 병들어서 그 후 왕이 싫어하는 도시가 되었다. 18세기, 잔드 왕조의 카림 칸은 테헤란에 궁전과 하렘의 건설을 명령하였고, 정부 기관도 이전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시라즈로 이전하게 된다. 테헤란이 이란의 수도가 된 것은 1795년, 카자르 왕조의 모하마드 칸 아자르가 이곳에서 즉위한 이후부터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과 영국군이 테헤란에 입성하였고, 1943년에는 연합국 수뇌가 테헤란 회담을 가졌다. 전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고레스탄 궁전이나 오울드 테헤란 지역의 건물, 성벽과 성 등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많은 건축물이 철거되어 재건축되고, 거리의 모습도 바뀌었다. 바자르도 절반 이하로 축소됐다. 이란 - 이라크 전쟁에서 스커드 미사일의 표적이 거듭되는 공습도 막대한 피해를 냈다. 동시에 테헤란에는 난민이 모여 혼잡을 빚었다. 이란 - 이라크 전쟁 당시 소련식의 집합 주택이 난립하면서 테헤란은 또한 역사적 건축물을 잃었다. 현재는 50층이 넘는 아파트 등 초고층 건물의 빌딩이 늘고 있다. 높이 435m의 새로운 랜드 마크 밀라드 타워도 지어졌다.
지도 - 테헤란 (Tehran)
나라 - 이란
이란의 국기 |
이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들의 발상지이다. 기원전 2800년 경 엘람 왕국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700년경에 이란계 메디아인들이 이란 유역을 통합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기원전 6세기 경에 키루스 대제가 아케메네스 제국을 건설하면서 그 국력의 정점을 찍었다. 당시 아케메네스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들 중 하나였기도 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제국은 기원전 4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왕에게 패퇴하면서 멸망하였고, 그 자리에 여러 그리스식 국가들이 세워지면서 쪼개지게 된다. 기원전 3세기에는 페르시아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성매매범죄와 신성모독범죄를 자행하는 도공장들과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파르티아 제국을 세웠으며, 3세기경에는 파르티아 제국을 계승하여 사산 제국이 새로이 들어섰다. 사산 제국은 이후 약 400여 년 동안 세계적인 제국으로 군림하였다. 7세기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왕국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후 페르시아 지방의 급격한 이슬람화가 진행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즉 이란 지역은 이슬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번영하면서 미인들의 나라로 유명한 이슬람의 황금기를 다시금 이끌었다.
통화 / 언어
ISO | 통화 | 상징 | 유효숫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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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R | 이란 리알 (Iranian rial) | ï·¼ | 2 |